세인트 폴 대성당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관광명소 아닌 '그냥 길'은 사람이 없어 정말 썰렁했다. 성당 앞에 도착했지만 아직 미사가 시작하기까지 2시간이나 남았기에 여기서 버스를 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가기로 했다. 아벨리나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꼭 보고싶어 했는데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얼마나 반가울까?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의 지루함과 못생김을 깨닫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건너편의 귀여운 투어버스
이 곳으로 온 까닭은 런던아이와 국회의사당을 보기 위한 것 뿐! 그리하여 사진만 빵빵 찍은 채 그 옆을 지나는데.. '어랏?' 눈에 익은 사람이 보였다. '아벨리나!!'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방방뛰며 그녀 앞에 털썩! 이름을 힘차게 불렀다. 어제 과음한 그녀였기에 상태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매우 피곤해보였음. 하하. 워크캠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홀로 여행을 하는게 너무 외롭고 허전했단다. '이젠 나도 런던에서 친구가 생겼어!'
길가에서 재잘재잘대다 사원이 주는 그늘로 가서 잔디밭에 몸을 내던졌다. '아이고야 좋다!' 여행 중 부리는 여유는 꿀맛과도 같았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구! 음키키. 둘이서 셀카 한방을 찍고 도시락을 까먹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좋구나야~
(아일랜드도 그렇지만)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자고, 이야기를 하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여유를 가질 줄 아는 모습이 참 좋았다. 차도 옆, 인도 옆.. 가리지 않는다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라 부럽기도 했지. 잔디 보기도 힘드니까.
5시 45분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오르간 연주가 있을거란다. 그 사이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런던아이와 빅벤을 보러 몸을 일으켰다. 한번이라도 더 보고자 목을 쭉- 빼고 열심히 구경했다. 황금빛 빅벤의 웅장한 모습이 든든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은 아벨리나는 내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다. 구경하기에 바빠서 대화도 별로 안했던 것 같다. 하하하.
저멀리 빼곰히 모습을 보이던 런던아이와 빅벤
빅벤을 지나 런던아이가 눈 앞에 보였다.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멈춘줄 알았다. 내 생각엔 어릴 때 타던 놀이기구처럼 2명씩 앉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커서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캡슐 속에서 선 채로 창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바퀴를 도는데 약 1시간이 걸리는지라 홀로 많은 사람들 속에 껴있는다면 굉장히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가격이나 한번 알아보자 해서 매표소 건물로 들어섰더니 흐미, 비싸다. 탈 마음도 없었지만. 화장실이나 한번 갔다왔지 뭐.
런던아이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엔 귀신의 집, 식당,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등이 있어서 노천카페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아벨리나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깍!!'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얼굴에 피로 물든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어찌나 놀랬던지.. 귀신의 집에서 온 호객꾼이었다. 큭큭큭. 거친 목소리로 나에게 뭐라뭐라 했는데 손을 절래절래 흔들면서 아벨리나와 깔깔거리다 자리를 피했다. 나 때문에 뒤에서 걸어오던 분도 놀라신 듯. 돌아올 때 보니까 귀신분장을 한 여자와 사진찍는 사람들도 보였다. 저-기 보이는 아까 그 분은 다른 사람들을 놀래키는 중. 지금봐도 징그럽긴 마찬가지다.
런던아이를 보고 돌아오는데 친구와 함께 걸어오는 클레먼타인을 만났다! 넓으면서도 좁은 곳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오른쪽에, 빅벤을 정면에 둔 채로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워크캠프 누군가의 비밀스런(?) 얘기를 들으며, 놀라고, 웃고, 충격을 받았다. '엄머머머머..' 그와 함께 내 머릿속은 '성당엘 가야하나, 오르간 연주를 봐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원하는 것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4년 전에는 첫 여행인데다, 끔찍한 외로움에 내 발로 한국인을 찾아 동행했던터라 여정이 바껴도 혼자 빠져나올 생각을 애써 피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흥정'이 여행의 일부였던지라 언니 오빠들의 솔선수범에 몸이 편하기도 했고.. 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이번엔 그 불편함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한적한 곳을 여행한다면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꼭 필요하지만, 런던같은 대도시를 여행하기엔 혼자여도 전혀 불편할게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기에도 바쁘니..
세인트 제임스 공원으로 들어서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 성당 한구석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있던터라 의자엔 앉지 못하고, 연주하는 모습을 전혀 볼 없는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았다. 성당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오르간 연주를 들으니 행복한 기운이 물씬 흘러왔다. 서양의 고전 의상을 볼 때의 기분이랄까? 하하. (개인적으로 꽤 좋아한다는..)
1시간쯤 지나자 연주가 끝나고 버킹엄 궁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궁전 옆을 살짝 스쳐지나 세인트 제임스 공원으로 들어섰다. 청솔모(?)가 몇마리 있어서 사람들한테도 폴짝폴짝 기어오르고 먹을 걸 주면 얌전히 두손으로 받아먹는데, 길들여진 모습에 안쓰러울 뿐이었다.
버킹엄 궁전 문앞에서 사진찍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문 창살에 기대어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함께.
다음 목적지는 하이드 공원. 걸어서 가느라 꽤 오래 걸렸다. 지도를 보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도착했지만 이미 시간은 8시가 넘었다. 공원이 엄청나게 커서 그냥 입구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날도 꽤 쌀쌀해졌다. 공원 뒷쪽에서는 콘서트를 하는지 노래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잠시 얘기를 나눈 후 공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아벨리나를 배웅해줬다. 역시나 버스타는 법을 모르던 그녀를 위해 버스 정류장을 찾아준 후 난 빅토리아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조금 떨어져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남은 여행 잘하길 바래!'
숙소에 들렸다 나가려고 했는데 벌써 9시다. 그래서 그냥 국회의사당 방향으로 걸었다. 복스홀을 지나는데 거리가 꽤 되서 또 길 잃은 줄 알았다. 그럴 땐 지도 볼 필요없이 버스정류장에 있는 정거장 지도를 보면 된다. '이 길이 맞군..'
템즈강변을 따라 난 길을 걸어 국회의사당에 도착하니 이미 10시.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조금 무서운 기분도 들었다. 10시쯤 되야 해가 지기 때문에 야경을 보려면 밤 늦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게 조금 그렇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야외에 있을 수 있다는 장점도 동시에 가지고있다. 저 멀리 보이는 둥그런 보름달이 탐실탐실.
빅벤을 뒤로하고 단체사진을 찍는 어느 외국인 무리와 다리 난간에 기대 런던아이를 찍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강변 저기 저 건너편에서 오는 불빛들이 참 아름다웠다. 사진이 마구 흔들려서 눈이 아프지만 실제로는 꽤 멋졌다.
손떨림은 가볍게 무시해줌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다. 다들 들떠있는 모습. (런던에 한국인 무지 많음!) 난 타워브릿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30분이 넘도록 오질 않길래 그냥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곳에서 탈까 하다가 12시간째 런던을 돌아다니고 있는터라 너무 피곤해서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보고 가는게 조금 섭섭했지만 일단 피곤한게 우선인지라.. 다리도 아프고 머리까지 띵했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을 지나 빅토리아 스트릿(?)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순식간에 버스 한대를 놓친 후라 상당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우악. 집에 도착하니 12시. 샤워를 마치니 새벽 1시. 회의 참석차 왔다는 대학원생 두분, 남편과 세계여행 중이라는 여자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빼놓을 수 없는 취업 얘기, 쇼핑, 은행원, 돈, 명품 이야기에 속까지 안좋아지는 것 같았다.
내셔널 갤러리
트라팔가 스퀘어, 뒷편의 내셔널 갤러리
다음날 아침! 누군가의 알람소리에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몸이 천근만근 안 쑤시는데가 없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 다시 꿈나라로-. 7시쯤에 다시 일어나선 씻고 배낭을 꾸렸다. 민박집 아침 식사가 7시 반이라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설 참이었다. 4달만에 제대로 된 한국음식이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걸 느끼면서 알 수 없는 행복함이 흘러넘쳤다. 시금치, 어묵볶음, 김치, 닭도리탕, 달걀국 등등. 주인언니 음식솜씨가 일품이었다. 건강해지는 기분!
어제 그 분들은 백화점에 간다며 한껏 멋을 부린 채 외출을 하고, 난 몇 시간 안남은 런던여행을 위해 트라팔가 스퀘어로 향했다. 옥스포드 스트릿 같은 곳도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질 않았다. 어제 못 가본 세인트 폴 대성당과 코벤트 가든이 영 마음에 걸렸다.
피카딜리 서커스
아직 10시가 안된 시각. 내셔널 갤러리 앞의 분수대를 보며 앉아 있다가 어제 산 엽서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얼떨결에 들어선 피카딜리 서커스. 뮤지컬을 보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이 곳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옥스포드 스트릿이 나오던데 아일랜드 돌아와서야 알았다. 하하. 결국 우체국 찾기엔 실패. 내셔널 갤러리로 돌아오니 막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갤러리 들어서기 전, 트라팔가 스퀘어
여행지마다 빼놓지 않는게 아니라 필히 빼놓는 곳 중의 하나인 갤러리! -_- 캠브리지 핏츠윌리엄 박물관에서도 시큰둥 했던지라 별 기대는 안했다. 온 방을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챙겨봤는데 이번에 조금 달랐다.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림 옆에 붙은 설명을 읽으며 '아하아하' 몇번. 그래도 부족한건 마찬가지. 내셔널 갤러리 투어도 있었지만 시간이 안 맞았았고.. 아쉬운대로 그림을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다.
엽서가 도착하긴 했는지.. / 더블린 공항에서의 한 컷, 비가 엄청 내렸다.
이젠 떠나야 할 시간. 루튼 공항행 버스표를 사기 위해 빅토리아 코치역으로 갔다. 꽤 오랫동안 줄 서서 기다렸는데 들려오는 대답은 '여기선 버스표 안팔아요. 코치역 앞 그린라인 정거장으로 가세요.' 그린라인 버스표 사는 곳이 따로 있었군. 제길. 시간이 빠듯해서 일단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 나왔다. 오이스터 카드를 반납할까 하다가 쫘라락 늘어선 줄을 보고 포기한 채 버스정거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매표소에 갔더니 '버스 기사한테 직접 사야해요.' 이런.. 7번 정거장을 찾는데 이건 또 어디 붙어있다니! 빙빙 돌다 기사 아저씨한테 묻고 나서야 찾을 수 있었다. 루튼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추적추적. '아쉽다! 아쉽다, 아쉽다!'
참! 엽서는 결국 아일랜드 도착해서 부쳤다. 하하하. (엄마, 엽서 도착하면 알려줘요!)
워크캠프에서의 일주일, 캠브리지와 런던에서의 이틀.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성공적이다 못해 '완벽한' 첫번째 휴가였다.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고민의 결과, '라르쉬는 내가 행복해질 수 없는 곳인 것 같다.' 워크캠프를 하는 동안 라르쉬가 전혀 그립지 않았으니.. 또한 라르쉬로 돌아온 후 내 기분이 점점 가라앉고, 말이 없어지고, 우울해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나'일 수 없는 이 곳. 아무래도 여길 떠나는게 좋을 것 같다.
결론: 9월에 라르쉬를 떠나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막막하고 내키지도 않고. 휴가의 후유증인지 갑자기 유럽여행이 땡기고,.. 하우스 어시스턴트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맞는 건 무엇인지 깨달은 것도 아니니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다른 단체를 알아보는 중.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조금 미뤄질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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